어머니는 서울전역에 등화관제가 처음 실시되고 난징대학살이 시작되던 1937년에 태어나셨습니다. 한국전쟁의 어려움 속에서 온갖 노동과 가정의 이중고 속에서 2남1녀의 자녀를 길러낸 자랑스러운 어머니 이십니다. 군인이셨던 남편과 함께 격랑의 세월을 견디신 어머니는 이제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시고 있지만 행복하고 좋은 기억만을 떠올리며 삶을 이어가시면 좋겠습니다. 함께 있지만 늘 그리운 어머니를 기억하며 그 그리움과 고마움을 기록해 보고자 합니다.
어머니의 세대
우리나라 여느 어머님과 마찬가지로 저의 어머니의 인생은 어린시절부터 불안과 공포의 삶이었을 것입니다. 부분 부분 기억을 되살려 말씀하시는 내용 외에 굳이 말씀은 하지 않지만 일제가 강점한 시기에 견뎌야 하고 버텨야 하는 상황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이웃들이 피난을 가고 총에 맞아 쓰러질 때 어머니는 여자의 몸으로 끼니 보다는 눈물을 먼저 배우셨을 것입니다.
당시 어머니에게 평범한 학업보다는 생존이 우선이어서 학창시절은 꿈도 못 꾸는 시기를 지내셨습니다. 공부를 못한게 평생의 한이 되어서 아들과 딸들이 학교를 다니는 즈음에 어머니는 함께 야학을 다니셨습니다. 아마도 70대였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초등과정을 졸업하고 중등과정을 졸업하시며 제대로 편지를 써가며 본인의 인생을 말씀하셨습니다.
흔들리지 않았던 사랑
아버지의 직업은 군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4.3사태를 겪었고 젊은 시절 군에 입대하셨습니다. 직업의 특성상 집을 비우기 일쑤였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안계신 시기에도 아이들을 지켰습니다. 늘 가난했지만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자녀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님이 굳이 말씀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들은 어머니의 살이 터진 손등에서 골이 깊게 파인 주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늘 말없이 세 아이를 키웠습니다. 큰 아이가 열이 펄펄 끓을 때도, 옛날 연탄을 때던 시절 연탄가스를 맡아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을 때도 어머니는 흔들림 없이 어머니였습니다. 아버지는 제대하여 노동을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무말 없이 큰 고무 대야에 매일 김밥을 만들어 팔러 나가셨습니다. 며칠이나 되었을까 단속반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누나가 허둥지둥 가서 모셔오기도 했습니다. 우리들이 어렸고 가정의 형편을 잘 모를때라서 그만 두시라는 말조차 우리는 하지 못했습니다. 다 빼앗긴 빈 김밥대야를 보며 누나는 밤새 울었습니다. 어머니는 이런 일상을 겪으면서도 세 아이의 도시락을 싸 주실때면 친구들한테 빠질까 걱정에 새벽부터 일어나 도시락을 싸주시고는 하셨습니다.
어머니에게 우리는 짐이 아니었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어떤 표현이던 혼자보다는 훨씬 힘이 들었을거라 짐작을 합니다. 힘을 보태고 어려움을 이겨낼 가족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세 아이뿐 아니라 10형제인 아버지의 4촌 자녀들이 지방에서 서울로 대학이다 군입대다 시험이다 올라올 때면 영낙없이 우리집에서 며칠을 몇 년을 함께 지냈습니다. 개인주의로 만연된 지금시기에 그때 어머니의 그 마음은 그 정성은 우리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기억의 시간
어머니는 현재 점점 기억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치매로 사신지 오래십니다. 자식의 이름도, 손자의 이름도, 함께한 기억도 희미해 지고 있습니다. “이게 뭐지, 누구지, 어떻게 하더라, 여기가 어디더라” 하고 중얼거리실 때는 가슴이 미어집니다. 지금의 어머니는 정말 아이처럼 연약하고 순수한 모습만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라도 얼마나 볼 수 있을까 오랬 동안 건강하셔야 하는데 우리가 부모가 되어보니 헤아리지 못하는 어머님의 마음에 면도날에 스친 것처럼 가슴이 쓰립니다. 우리는 안되고 어머니는 당연히 희생을 해야 했다는 생각은 분명 잘못입니다. 우리에게 어머니란 자신을 희생하고 입에 넣었던 것이라도 꺼내어 아이들에게 먹여야만 했던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희생”이라는 단어로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를 이렇게 기억합니다. 밤 늦게 오시는 아버지를 위해 아랫목 이불 속에 밥 그릇을 넣어두셨던 분, 본인은 굶어도 아이들의 입에는 조금이라도 더 먹여 주시던 분, 아이들의 육성회비가 밀릴때는 체면을 무릅쓰고 주변에 도움을 청하셨던 분, 저녁을 먹고 다듬이돌에 천을 올려 방망이질 하시던 분, 콩을 곱게 쑤어 맷돌을 돌려 콩국을 만드시던 분, 명절이면 몇 백개의 만두를 빚느라 허리한번 못 펴셨던 분, 매일 새벽 일찍 출근하시는 아버지의 진지를 차리셨던 분, 매일 아버지의 군복을 다림질 하셨던 분, 손자 손녀가 태어나셨을 때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셨던 분, 몇 년을 모은 돼지저금통을 아이들 학용품 사라고 내 놓으시던 분, 평생을 잠자리에 들기전 잠든 아이들을 보며 잘 살게 해 달라고, 건강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셨던 분으로 기억합니다.
어머니의 치매는 기억을 빼앗아 갈 수는 있겠지만 우리에 대한 사랑은 빼앗아 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는 어머니가 말씀하지 않아도 돼지저금통을 내어주지 않아도 그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몇 년을 더 사실지 모릅니다. 이제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매일 매일 어머니가 더 보고 싶습니다.
오늘은 어머니가 더 그리워지는 생신입니다. 어머니는 지금의 시간외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우리는 어머니가 이렇게 살아냈다는 것을 기억해드립니다. 지금 곁에 어머니가 계시다면, 늦기 전에 꼭 안아드리고 싶습니다.
https://youtu.be/5HNmzEPG8OM?list=RD5HNmzEPG8OM
Mother Of Mine Neil Reid, 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