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북쪽 방향에 위치한 성북구는 지하철 4호선이 통과하는 곳이고 주변 정릉동 장위동 월곡동 돈암동 안암동 월곡동 삼선동 외에도 많은 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재는 서울의 어느 지역을 가던지 아니 서울의 외곽을 포함해서 지방 소도시를 가던지 멋지고 정돈된 도시의 모습을 볼 수 있겠지만 오늘은 예전의 돈암동, 우리가 자라던 시기의 돈암동을 추억을 되살려 표현해 보고자 합니다. 시작 글이긴 하지만 왠지 현대식 건물 보다는 구 시가지, 한옥과 구옥이 즐비한 그림이 그려집니다. 평지였다면야 쭉 뻗은 길에 반듯한 한옥을 상상하겠지만 고도의 높낮이 때문에 소위 산동네가 존재하던 지역이었습니다.
사연 많은 돈암동의 거리
돈암동은 70년대 ~ 80년대, 90년대까지 예쁘고 멋진 학생이 넘쳐나는 지역이었습니다. 다들 회상하시다시피 돈암동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초등학교, 중학교, 성신여자대학교, 돈암동 4거리, 몇 안되는 사통팔달의 버스정류장, 단장의 미아리고개, 호떡집, 점집, 고려대학교 뒷산, 사찰 등입니다.
단어에서 이미 느끼시는 것 처럼 70년~80년대의 돈암동은 국민대학교에서부터 광화문에 이르는 강북의 학교들 명문 중고대학교들이 한줄로 늘어선 중심에 위치해 있습니다. 어르신들의 기억에도, 현재 50~60대의 장년층 들도 기억하듯이 당시에는 버스에서 내뿜는 매연을 맡아가며 미아리고개를 오르내리던 시기였습니다.
돈암동의 중심과 주변에는 성신여대와 태극당, 나폴레옹제과점, 중국음식점 장강, 성북구청, 성북경찰서, 돈암성당, 동도극장, 미도극장 그리고 주변 돈암국민학교, 용문중고등학교, 성신여자대학교, 삼선중학교, 홍익중고등학교, 고명중학교, 매원초등학교, 성신여중고, 경동고등학교, 안암동 대광고등학교, 위로는 정덕국민학교, 미아국민학교, 홍익대사범대부고, 경신중고교, 삼선초등학교 등 크게 의미 없을 수 있지만 이름을 한번 불러 봄으로써 그 시기의 추억을 소환하고자 합니다.
광화문쪽으로 조금 더가면 창경궁, 일본이 식민지배하던 시절에는 궁에다가 코끼리 등 동물들을 넣어놓고 창경원이라 동물원을 만들었던 곳도 있었습니다. 그 옆자락으로 가면 근처에 성균관대학교와 젊음의 거리 대학로가 있습니다. 많은 공연장과 거리공연, 지금은 성공한 가수와 연예인도 많지만 거의 모두가 혜화동 출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평일이어도 주말이어도 젊음이 넘치던 거리였습니다. 한 때는 차없는 거리로 긴 4차선 도로에 삼삼오오 친구들끼리 않아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하고 거리공연을 보거나 막걸리 한잔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대충 많이 먹었다 싶을때는 시청근처로 옮겨 당시 "코러스" 라고 하던 지금으로서는 음악카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음악을 노래를 좋아하는 학생들만 입장이 된터라 술은 팔지 않았고 기본이 음료수 한잔 1000원~2500원에 교과서(노래책) 한권. 노래를 좋아하고 교회를 다니고 등등 재능이 있는 대학생들이 자리를 꽉채워 노래책을 피아노 연주자이자 사회자가 개그를 섞어 인도할 때면 코러스가 된 정말 감동적인 노래들이 건물 밖으로 퍼저 나갔습니다. 연주자의 설명을 듣자면 그곳은 초년생 가수들이 거쳐가는 곳으로 양희은씨나 통기타 가수들이 모두 올랐던 무대라고들 했습니다.
언젠가 40대때로 기억되던 해에 돈암국민학교를 가 보았습니다. 수십년이 지나 그리 넓고 운동회나 체력검사때 그리 멀었던 몇천명이 북적대던 그 시절 그 학교가 손바닥 만한 크기로 변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눈높이가 달라진 탓이겠죠. 당장이라도 친구들이 교실 창문에 붙어 이름을 불러줄 것만 같았습니다.
돈암동에서 정릉에 이르는 미아리고객를 두고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노래도 있었습니다. 한국전쟁때 미아리고개를 통해 북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던 가족들의 애절함을 느끼게 하는 노래입니다. 돈암동에서 미아리고개 정상을 막 지나치는 위치에는 호떡집이 즐비하게 있었습니다. 그냥 호떡이나 후라이팬에 튀기는 지금의 호떡이 아니라 흙으로 지은 화로에 굽는 호떡이었습니다. 큰 손바닥만 했습니다. 소풍을 갔다오다가나 추운 겨울에 스케이트를 타고 오다가 하루종일 공부하다가 허기진 학생들이 주로 고객이었습니다. 그 호떡안에 설탕이 많지도 았았지만 크기만큼 물리지 않는 맛이었습니다. 두세개를 먹으면 배가 부를만큼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건장한 학생들이 많이 먹기 내기를 할때면 4개?, 6개를 넘기지 못할 만큼 크고 배부른 호떡이었습니다. 지금도 차를 타고 지나갈 때면 그 때 그 호떡의 맛이 그립습니다.
미아리 고개의 우측으로 한블럭을 가서 고개로 오르다보면 우측에는 성신여대를 감싸는 높고 1km 정도가 넘게 긴 돌담이 있습니다. 미아리고개의 중앙까지 오르자면 고개를 두고 좌우로 연결되는 굴이 있었구요. 왼편에는 수 많은 점집들이 즐비하게 영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아리 점집 하면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 였습니다. 미아리고개에서 우측으로 올라가다 보면 어릴 때의 많은 추억이 서린 우리 동네가 있습니다. 작은도로 입구부터 몇미터 간격으로 민정약국(나중에 세민약국(경세제민) 변경), 셈베과자집, 문방구, 떡볶기집, 두부집, 옷 수선집, 우물집(당시에는 우물물을 사서 원통지게에 양쪽에 걸어 나르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우물집에는 주민들이 물을 사면 주인의 물이 담긴 우물통에 5원짜리 동전을 던저 넣은 모습이 기억이 납니다. 이어 올라가면 수원사?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절이 있었고 이곳도 한참을 드나든 기억이 있습니다. 더 올라가면 개운사, 높은 곳에 입상 불상이 있는 방생선원... 더 오르면 그 높은 곳에도 농가들이 즐비하게 있었습니다. 당시 외가댁에서 키우던 큰 개들 메리, 쫑을 데리고 고대 뒷산을 뛰어 다니던 생각이 납니다.
눈싸움을 했던 돈암동
개운사로 향하는 우물집을 지나기전 좌측 골목은 수십개의 계단이 있고 그 좌우로 많은 집들이 촘촘히 있었습니다. 대여섯 계단을 오를 수록 좌우에 장독대를 갖춘 기와집들이 층층히 있었고 이 집에서 맞은편 집의 마당이 보일 정도였습니다. 거의 꼭대기에 오르면 자그마한 가게가 하나 있었습니다. 동네 아주머니가 운영하던 곳이었습니다. 그 집 누나와 형들도 있었습니다. 그 우측의 집, 제가 자라던 집입니다. 창문으로 장독대가 보이고 장독대에 올라가면 계단 아랫동네와 미아리고개 멀리는 63빌딩도 보이는 높은 곳이었습니다. 불꽃놀이를 할 때는 명당자리였습니다. 지금에야 뷰가 좋은 곳이면 가치가 있다고 하지만 당시로서는 그냥 산동네, 달동네 였습니다. 눈이 오던 날이면 미끄러지지 않게 하려고 맨 위에서 다 탄 연탄재 몇개를 굴리면 자연스레 부서져 미끄럼 방지가 되기도 했고, 눈이 쌓이면 연탄재에 눈을 뭉쳐 아래로 아래도 던지던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등화관재가 있던 날이면 장독대에 올라도 서울시 전역이 캄캄한 흑암이었습니다. 새벽녁 크릉크릉 소리가 들리던날은 미아리고개를 통해 탱크, 장갑차등이 훈련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침에 보면 도로가 다 파여있었습니다. 그 시절 생각을 하다보니 잊었던 명칭, 지명, 이름들이 마구 생각이 납니다.
봄소풍
당시 가을에는 각 학교에서 주로 운동회를 하던 때였고, 봄에는 많은 초중고 학생들이 봄소풍을 갔었습니다. 영화써니에서 보듯이 많은 영화에서 70년~80년대 소풍을 그렸듯이 혜화동 창경궁(당시 창경원)을 국민학생들부터 중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줄에 줄을 서고 손에 손을 잡고 입장을 했습니다. 몇 안되는 벗꽃도 보고, 코끼리도, 원숭이도 보면서 우리는 그곳이 그런 동물원인 줄 알았습니다. 북쪽으로는 영락없이 고대뒷산, 개운산, 멀리는 수락산, 도봉산으로 소풍을 갔습니다. 말이 소풍이었지 그냥 힘든 산행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어떤 아이는 네모 도시락에 환타를 말아먹고 어떤 아이는 3단 김밥으로 어떤 아니는 젓가락 두개만 달랑 가지고도 모두가 행복해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식사가 끝나면 한 쪽 귀퉁이에서는 담배피던 아이들, 중앙에서는 선생님의 사회로 노래자랑, 춤자랑, 보물찾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등하교 시간
학생들이 많았던 돈암동의 등하교 시간은 시끌벅적 하기도 하고 조용하고 차분하기도 했습니다. 아침 등교를 하던 시간에는 상인들이 쓰레기를치우고 물청소를 해 놓은 터라 쾌적하고 밝은 길이었습니다. 게다가 매일 같은 시간에 지나치는 단발머리의 예쁜 사대부고 여학생때문에 3년 내내 지각 한번을 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타던 성북소방서 앞 버스정류장에서는 예쁜 자주색 빵모자를 썼던 중간키의 세화여고 여학생이 기억납니다. 이제 얼굴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버스를 타면 앉아있던 학생들은 서있는 학생들의 가방을 항상 받아주었습니다. 그러다가 급정거라도 하게되면 가방속의 김치병 반찬이 쏟아져 난처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항상 강북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버스에는 학생들이 꽉꽉 차서 운행을 했습니다. 그 많은 인원을 더 구겨넣는 사람들이 바로 안내양이었습니다. 우리와 동연배이거나 조금 어린 친구들인데 어려운 환경에 돈을 벌면서 주로 야학을 했던 친구들이었습니다.
눈이 많이 오던 날에는 승객을 구겨넣느라 안내양이 미처 타지 못하고 몇백미터를 지나친 후에 태우기도 했었고, 자칫 버스가 고장이라도 나거나 시동이 꺼졌을 때, 고개를 올라가지 못할때는 승객들이 모두 내려 버스를 밀기도 했습니다.
매일 하교길에 국민학교앞의 풍경은 문방구, 떡볶이집, 병아리 파는 아저씨였습니다. 꼭 닭이 될거라고 기도하면서 한두마리 병아리를 사가지만 1~2주만 지나면 영락없이 병아리들은 무지개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병든 병아리라고..
이젠 추억이 된 동네, 초중고교와 대학을 졸업하고 본가는 이사하고 본인은 객지에서 살고 있지만 그시절 돈암동은 잊지 못할 청춘의 고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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