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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지난 역사 1980~1990년대

by 한국인의생활 2025. 6. 12.

벤처기업 서울의 빌딩

 

1980년~1990년대는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에 복학하여 한동안 손을 놓았던 공부를 다시하게 되었습니다. 졸업반이 되어 취업을 하기 위해 아둥바둥 거리기도 하고 헤어져야 하는 동기들과 서운함에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직장과 쏟아져 나오는 업무를 하기위해 숱한 야근과 밤샘작업을 하면서 경제성장율이 오른다는 뉴스를 접하며 내가 그 주역이다라고 되뇌이기도 했습니다. 2000년대로 가는 길목에서 많은 아버지들과 국민들 모두가 열심히 일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새록새록 생각이 나는 군대생활

군복무를 하던 시절 장교임관을 위한 예식을 위해서 강원도 화천까지 가서 진달래를 몇백그루씩 캐 왔습니다.(물론 해당 소유주와 협의하에 진행했던 일입니다) 답례로 군에서 먹는 햄, 멸치 통조림, 쌀등을 드리고 진달래를 캐왔습니다. 잘 자란 2미터 정도의 분홍색 진달래는 임관식을 하는 좌우로 배치를 했습니다. 연병장 또한 우후죽순 자라난 잡초를 제거하고 사용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부내 내에는 몇백그루의 배나무도 있었습니다. 비료를 주는 시기에는 코를 찌를 듯한 냄새때문에 고생한 기억도 있고, 삭초기로 풀을 제거하는 업무는 한여름 때약볕에 고생스럽기도 했습니다. 장군들이 오는 날에는 몇백미터의 도로를 거품을 풀어 솔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내부반의 창문으로 연병장을 바라볼때는 반짝거리는 플라타너스의 잎새들이 정말 예뻐보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내부반의 보고서는 80년대산 올리버티 타자기를 사용할 때 였습니다. 틀리면 고칠 수도 없고 다시 처음부터 타이핑을 했습니다. 조경을 위해서 드로잉 펜으로 수업이 고쳐가며 작업하던 후임들이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마무리하고 도면처럼 조경이 되었을때는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글씨를 잘 쓴다는 칭찬과 함께 연말연시에는 대대장의 신년연하장 몇백장씩을 손이 곱아가면 쓴 기억도 납니다. 지금 부대 근처를 지나갈때면 넓고 푸르고 단정한 막사와 건물들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취업시장과 직장생활

졸업전에 원서를 받아 대기업에 취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몇개 회사중 원하는 대기업의 원서를 받아 서류를 만들고 먼 거리를 버스를 타고 찾아가 접수를 하고 한달여를 기다려 서류전형 합격통지서를 받았습니다. 어떤 일이 제 앞에 기다리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그러 합격했다는 기쁨에 좋아만 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연수원에 입소하여 통일된 유니폼을 받고 마치 학교처럼 회사의 역사와 하는일, 하게 될 일들을 교육 받았습니다. 교육시간이 끝난 저녁시간에는 8도에서 모인 동기들과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고 음식들을 먹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연수 마지막 날 대부분의 인원은 본인이 지원한 부서에 배치되기도 했지만 일부는 그렇지 못하고 회사가 지정하는 부서에 배치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총무 인사팀을 지원했는데 관리 경리부서에 배치되어 회계 업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야근에 철야에 심지어 1개월여를 밤새 복사하느라, 밀려드는 전표를 몇백장씩 작성하느라 한가해 질만하면 마감에 결산에 제대로 잠도 못자고 3년여를 지냈습니다. 잠자는 시간이 적으면 1시간 많으면 3시간의 시기를 지내며 몸무게가 적잖이 빠졌는데 공장 잔디에서 매일 하는 족구의 재미로 견뎌낸 것 같습니다.

이후 건강상 이유로 상장을 예정하는 회사에 입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상장을 예정하다보니 업무는 지난번 회사의 두세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상장을 하게 되면 얻게 될 회사의 성장과 보너스가 눈에 아른거렸습니다. 어렵게 기준을 통과해서 드디어 회사는 상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감회가 새롭고 가슴이 벅찼습니다. 당시는 민주정부가 들어서면서 밴처기업 열풍이 불때여서 기능, 기술을 가지고 하고싶은 일은 모두 할 수 있었던 시기 였던것 같습니다.  20억 매출이 70억으로, 130억에서 300억으로 몇% 성장이 아닌 그야말로 두배, 세배 성장하던 시기였습니다. 고생한 만큼 보람도 컸고 당시 많은 시간을 고민하여 함께 했던 몇백명의 직원들 또한 한 세대에서 크게 기여했던 가장들임은 분명했습니다. 

 

사회적 환경

벤처기업의 붐과 함께 IT의 괄목할 만한 성장이 진행되는 시기에 우리는 하늘에서 벼략맞은 것처럼 IMF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영화에서 나올법한 정부의 발표같이 그리 평범하게 이루어진 시대상이 아니었습니다. IMF 발표와 동시에 은행에서는 대출을 회수하기 시작해서 몇달치의 월급이 밀리는 것은 당연지사였고, 성장하는 시기에 대출없는 회사가 없었는데 대기업 1, 2, 3순위의 부채비율이 500%, 1000%, 2500% 였을 때입니다. 이마저도 대기업의 단독 운영이 아니라 정부와 함께하던 프로젝트들의 부채가 합산된 터라 일부 대기업의 파산과 몰락은 다분히 정치적인 판단도 있었을 거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IMF의 조건이 그러했을테니 어쩔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후 직원들은 반 이상이 퇴직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기회가 있을때 취업을 해야하는데 구인하는 회사는 없었고 당시는 부장, 연구소장의 나이대가 40대 였기 때문에 저를 포함한 이 시기의 가장들은 정말로 피눈물을 흘리며 생활하던 시기였습니다. 월급이 나오지 않아 두세군데 업체의 업무처리를 하고 용역비를 받아 월급을 채우느라 새벽 4시에 퇴근한 숯한 나날들이 기업납니다.

어려운 시기를 타파하기 위해 전국민들은 집안 장롱에 고이 모셔두었던 금들을 모두 꺼내어 팔았던 시기, 정부에서는 IMF가 조기 졸업을 하면 5년 정도만 고생하면 정상화 된다고 발표했지만 오랜 경험이 있는 어르신들은 IMF가 10년이 갈거다라는 예상을 하셨습니다. 결국 거의 2010년까지 그 여파가 있었습니다. 어르신들 세대에는 전쟁의 참혹함으로 맨땅에서 다시 일어섰지만 우리 자손세대는 총성없는 경제전쟁을 치뤘던 세대로 꼬리표가 붙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크고 작은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 우리가 해야할 일, 해서는 않되는 일들을 구분하고 장기적 미래비젼을 목표삼아 하나하나 차근차근 해나가야만 또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고 우리와 우리 자손을 위해 좋은 나라를 안전한 가정을 물려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