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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직장 생활

by 한국인의생활 2025. 6. 11.

 
 

63빌딩 덕수궁돌담길 1980년대 사무실 집기 공장 주택

 
한국 사회가 막 성장할 시기인 1980년대 직장 생활은 어땠을까 돌아보니 정말 감회가 깊기도 하고 많은 변화가 있었구나를 다시한번 느끼게 됩니다. 주로 대기업의 경우 현재처럼 개별 채용보다는 공개채용 형태로 직원을 뽑았었다. 지인의 경우 23명을 선발하는 3차에 걸친 경쟁에 8750명이 지원하는 등 치열한 경쟁이 계속되었습니다. 아무래도 공채다 보니 갓 입사한 회사에서 개인별 인수인계보다는 단체 연수를 통해 4일~7일 정도의 연수기간을 거쳤고 연수가 끝나는 날에는 4차 선발의 시험을 치루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피나는 노력이 없으면 살아남기가 어려웠던 시기였습니다. 과거를 회고하며 당시의 생활상, 문화상을 적어보기로 하겠습니다.

1980년대 직장의 근무환경

1980년대는 아직 통금시간, 민방위, 등화관제 제도가 남아있을 때였습니다. 이제는 정확한 시간은 가물가물하지만 10시? 가 되면 싸이렌이 울리고 거리에 일체의 통행이 제한이 되던 때였습니다. 다음날 새벽 4시가 되어서여 통행금지가 풀려 시민들이 거리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지금으로 봐서는 24시간 움직여도 모자랄 판에 대내외적 정치, 국방, 사회적인 문제가 원인이 되어 오래도록 통행금지가 이어졌습니다. 
회사에서 거의 14~16시간을 근무했습니다 현재도 그렇지만 근로기준상 업무시간이 정해지기 보다는 일찍 출근해서 책상 정리하고 사무실 정리하고 9시에 업무를 시작하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다니던 제조회사는 8시10분에 출근해서 국민체조로 전직원이  몸을 풀고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제조, 건설회사의 일부 회사들은 국민체조를 하고 아침을 시작하는 곳이 있기도 합니다. 당시는 제공되는 업무지침이 있다기 보다는 지인들에게 알음알음 물어 다른 회사에서 제작한 소책자의 업무지침, 초관리 운동, 조직관리등의 책자들이 전부였기 때문에 실제 본인의 업무를 메모한 종이 이외의 보조자료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간혹 외국 사무용 기기에 딸려오는 매뉴얼 정도가 대부분이었고, 본인의 업무는 종이서류와 빽빽히 자료, 숫자를 적어넣은 서류철이 전부였습니다. 
당시 본인의 업무는 회계였습니다. 전표를 작성하기 위해서 고무인으로 계정과목을 스템프를 찍어 날인하고 모두 수작업으로 표기하고 7명이상이 되는 결제라인을 거쳐 승인을 받는 방식이었습니다. 고정자산(현재 유형자산)의 감가상각을 하기 위해서 A3용지 13장을 풀로 이어 붙이고 일일이 선을 그어 항목을 분류하고 계산을 시작합니다. 주판으로 계산을 몇개월 하다가 도저히 결산의 시간에 해 낼수가 없어 일산 카시오 전자계산시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시간은 주판과 계산기로 흘러가는 시간이었습니다.
6개월여가 지난후 개발팀에 처음으로 AT 컴퓨터가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회계사들과 처음으로 감가상각 계산을 Lotus123이라는 스프레드 시트(현재의 엑셀과 비슷한 툴)로 계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판으로는 15일, 계산기로는 3일, 컴퓨터로는 30분에 일처리를 하는 변화를 1년도 안되는 환경을 신입사원들을 겪었습니다.
영업부, 경리부 등 마감이 있는 부서는 마감일자가 돌아오면 야근을 밥먹듯이 했습니다. 통금시간 때문에 건물의 전기는 9시면 소등이 되는데 업무중 전기가 나가 캄캄한 상황을 경험한 사람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예 사무실에서 밤을 새우는 날이 밥먹듯이 반복되고 하루 1시간 내외 잠을 자며 일을 한지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게 됩니다. 대기업은 1~2년 단위로 자료보조,  전표관리, 세무관리, 자금관리 등을 하다보면 경력이 쌓여 대리가 되고 과장이 되고, 치열한 경쟁으로 부장이 됩니다. 이틈에 가정과 육아는 오로지 아내의 몫이 되었고 가족 모두가 본인들의 일에 치여 여행은 꿈도 못꾸고 가정의 제사나 행사가 있을 때라야 겨우 얼굴을 보는게 전부였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산업의 역꾼이 되었고 오늘을 만드는 초석이되었습니다. 

1980년대 직장의 문화

당시의 월급은 명세가 표시된 누런 재생봉투에 동전까지 넣어 수작업으로 전달하던 시기로 월급봉투를 가져다 주는 월급날이 되서야 아내들은 미소를 지을때도 있었고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월급날 삼삼오오 친구들끼리 만나 한잔 두잔 걸치다 보면 월급 봉투가 홀쭉해 져서 아내들에게 핀잔을 들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월세가 2만원이었던 시대 입니다.
회식이라면 지금처럼 복리후생적으로 각자의 개성에 맞춰 음식을 먹거나 경기장을 가거나 하지 못하고 정해진 부서의 예산 안에서 한잔 하는게 전부였습니다. 회사에 잔디나 운동장 등 공간이 있는 시설에서는 삼겹살을 구워 소주한잔에 피로를 녹이기도 했고, 하루를 회식일로 빼서 족구 네트를 설치하고 하루종일 속옷만 입고 족구를 했던 기억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상사가 부부싸움이라도 했던 날이면 모든 결제가 정체상태로 눈치만 보기 일쑤였고, 숫한 나날을 그렇게 근무하다보면 명절 앞이라고 양손에 선물세트, 치약세트 등을 들고 고향으로 고향으로 향하고는 했습니다. 

1980년 당시 사회적 환경

얼마전 대통령 시해사건이 터지고 길거리에는 장송곡이 울려퍼지고 곳곳에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집 주변 큰 도로에는 자주 탱크와 장갑차가 광화문을 향하고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온갓 군물자와 군 병력이 오가는 시기였습니다.
이후 계속되는 선거에 정치색이 자주 바뀌고 합법이니 부정이니 하는 상황에서 온갖 뉴스는 땡전뉴스로 도배를 하고.. 학부모가 선생님을 방문하기 위해 자녀의 학교를 방문할 때가 되면 여지없이 여기저기서 최루탄 냄새에 손수건으로 코를 막아가며 눈물을 흘려야 했던 시기였습니다. 그것이 일상이었고 다친데 없고 몸아픈데 없이 사는 일상만이 행복이었던 시기, 퇴근시간에 아버지가 생선이나 고기 한근을 신문지에 싸서 들어오시고 붕어빵과 고구마 봉투를 내일던 시기, 도란도란 형제들고 담소를 하고 늦은밤 살짝 허기가 질때 밖에서는 메밀묵 찹싹떡을 외치던 상인에게 창문너머로 떡을 사서 먹던 정감있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들은 참 많은 교육을 받았고, 교육을 받기위해 치열하게 공부했고 이 때문에 2025년 우리가 이자리에 반듯이 자리하고 있음이 감명깊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부모세대를 모셔야 했고 자녀를 보살펴야 하는 세대지만 현재는 부모는 모셔야 하는데 우리의 노후는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준비해야 하는 세대로 환경이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이 10년후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궁금한 하루입니다.